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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뉴스] (6.25전쟁)한국전쟁은 사실 6.23전쟁이며 남한의 북침04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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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편     연재




●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950년 6월 25일 개전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한 전황보고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미국 원동군 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38도선 남쪽으로 포 사격을 개시한 시각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40분이었고, 그로부터 약 20분동안 포 사격이 계속되다가 오전 5시경부터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38도선을 넘어 한국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역사자료를 조사한 한국군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미국원동군 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에서 6.25전쟁 개전상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1) 오전 6시경 서울의 미국군사고문단은 일본 도쿄의 원동군 사령부에게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전황을 처음 보고했다.(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38도선 전투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전황보고는 38도선 개전상황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었고,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고였다.)


2) 오전 7시경 미국군사고문단 참모회의가 소집되었다. 참모회의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 한국군과 무력충돌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최초 판단은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황보고로 둔갑했다.)


3) 오전 9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로부터 옹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옹진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은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군사고문들의 신변위험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전원 철수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로크웰도 철수명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4). 오전 10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서울에 주재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에게 38도선 전황을 통보했다.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38도선 전황을 통보받은 무쵸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전문을 보냈는데, 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오전 4시경 옹진에서 북조선군의 포사격으로 행동이 개시되었다. 오전 6시경 북조선 보병부대가 옹진지구, 개성지구, 춘천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해안상륙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중략) 공격의 성격과 방식을 보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7시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그들은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으로 보이는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혀 다른 전황보고를 무초에게 통보한 것이다.


무쵸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에서 시작된 무력충돌이 시차를 두고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차츰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려면,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여단 미국군사고문들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크웰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미국군사고문들은 왜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6월 25일 아침 서울에 모여 있었을까? 한국군 최전방 부대들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들은 주말마다 최전방을 떠나 서울에 가서 휴일을 즐겼다. 토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4일 밤 서울에서는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그 연회에서 술과 춤을 마음껏 즐기다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6월 25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개전당일 38도선 최전방에 미국군사고문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1950년 6월 25일 최전방에 남아 있었다. 그가 왜 서울에 가서 주말을 즐기지 않고, 개성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전당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미국군사고문이었다.


그렇지만 개전당일 개성에 있었던 대리고는 옹진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도쿄에 설치한 원동군사령부 청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은 도쿄에 있는 원동군사령부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면서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다. 그러나 정작 1950년 6월 25일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군사고문들은 38도선 최전방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전전황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댔으며, 나중에 작성한 개전전황 보고도 제멋대로 가공처리했다.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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