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뉴스] (6.25전쟁)한국전쟁은 사실 6.23전쟁 남한의 북침..03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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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편 시리즈
<역사적 팩트>
●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1950년 6월 25일에 펼쳐진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자신이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회고록에 서술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백선엽이 서울 용산에 있는 한국군 육군본부에 가려고 자기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백선엽이 육군본부 청사 2층에 있는 육군참모총장실로 올라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장교 7~8명이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군사고문단이 독점통제하고 있었으므로,한국군 지휘부는 미국 군사고문단으로 부터 군사정보를 제공받기전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까막눈 신세였다.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라는 채병덕의 호통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백선엽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백선엽은 사단장이라는 군직만 가지고 있었고, 사단을 지휘통제하는 진짜 지휘관은 로크웰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로크웰은 한국군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 사택에서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선엽이 로크웰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더니,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그는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선엽과 로크웰이 군용차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까지 미국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들에게 개전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고, 개전상황에 대처할 긴급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로크웰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으로서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에서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지휘 통제하였는데, 그처럼 중요한 군직에 있는 그가 당일 오전 9시까지 개전상황을 몰랐으므로, 미국군사고문단도 개전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사단, 여단, 연대마다 군사고문을 10명씩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는데,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의 작전고문은 미국육군대위 '조섭 대리고'였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을 떠난 백선엽과 로크웰이 경기도 파주군 파주국민학교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전방지휘소에 도착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로크웰이 오전 9시경에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오전 9시 30분경 파주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정부지휘소에 도착했다고 썼지만, 오전 9시경 수색에 있는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잠시 머문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경에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파주에 있는 사단전방지휘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개성쪽에서 포성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임진강 철교 남단까지 나가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자기 군용차를 몰고 “뭔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겁지겁 패주해왔다. 황망히 패주하다가 임진강 철교 남단에서 뜻밖에 로크웰 일행과 마주친 대리고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큰일났다. 적들이 이미 기차로 개성역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포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과 로크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의 첫 명령이 작전현장에 하달되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고문단본부에서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철수명령을 받은 로크웰은 백선엽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진 백선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전황보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공격주체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오전 4시에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시각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범위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사진>
이 사진은 2020년 6월 16일 북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장면이다.
파주쪽에서 바라본 사진에는 검은 폭파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이 담겼다. 북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적대정책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으로 하여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말해주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70여년 전에도 개성지구 38도선에서 남북의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도 개성지구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 위험이 고조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었어도 분단체제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조국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분단체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평화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분단국가의 평화는 오직 통일국가건설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조국통일은 매우 시급하고,절대적인 민족사적 과업일 것이다.
이상.. 0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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