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뉴스] (6.25전쟁)한국전쟁은 사실 6.23전쟁이며 남한에의한 북침이다. 2편
컨텐츠 정보
- 143 조회
- 0 추천
-
목록
본문
02편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4년전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미국 육군성은 주한미국군 철수를 완료한 이튿날인 1949년 7월 1일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설치했다. 군사고문단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주재 미국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이 글에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이라는 약칭을 쓴다.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어떻게 지휘통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군의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1950년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은 미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보병사단만 미국군 밑에 들어간것이 아니라,한국군 전체가 미국군 밑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군 밑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1990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에 창군된 이래 1990년까지 42년 동안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아온 것이다. 1990년 10월 1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지금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 행사한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군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육군 소장)은 자기 군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공식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사단을 현지에서 사실상 지휘통제한 지휘관은 미국육군 중령 로이드 로크웰이었다.1950년 당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이 2010년에 남긴 회고록을 보면, 로크웰은 수석고문이라는 군직을 가지고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사실상 지휘통제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수석고문 밑에 작전고문, 정보고문, 통신고문, 군수고문, 군단연락장교, 공지(空地)연락장교, 연대고문 등 10명을 두고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어깨에 별을 단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국군 중령의 지휘통제를 받는 치욕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과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미국군에게 매달린 것이야 말로 한국군이 겪은 불행과 비극이었다.
70여년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75년 동안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변함없이 주한미국군 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 몇 해 전쯤에 미국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도, 한국군은 아직 돌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느니 또는 ‘철통같은 혈맹’은 영원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미국군의 작전통제를 계속 받으려고 한다. 미국의 발밑에서,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수 없고, 조국통일도 실현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터 군사정보를 독점 통제했다.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수집한 군사정보는 수석고문을 통해 미국군사고문단 본부에 직보되었다. 이런 사정은 미국군사고문단이 6.25전쟁과 관련된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 통제하였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짤막한 전황보고를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통보했다.
무초는 자기가 받은 전황보고를 워싱턴으로 급히 타전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아니 의심해서는 안되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그날 새벽에 38도선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역사기록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적당히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과 남측의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미국군사고문단이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에 의거하여 6.25전쟁 개전상황을 왜곡했다.
6.25전쟁 74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 전쟁의 개전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것이다.
<사진>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1950년 7월 미국군사고문단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에 밀려 서울에서 대구로 후퇴했다. 위의 사진은 당시 대구로 피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임사청사를 정문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올해 2024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1편 끝.
2편에서 계속~~~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