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뉴스] (6.25전쟁)한국전쟁은 사실 6.23전쟁이며 남한에 의한 북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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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보 내용 ☆여섯째의 비밀
《한국전쟁은 북침》
☆ 여섯째 (일목요연하게 연결되는 6ㆍ23전쟁)
단독입적으로 6.25(한국전쟁) 남침이냐?? 북침이냐?? 의 역사적 제보입니다.
팩트는: 여러 사료(자료)를 짚고 궁리 ㆍ연구 후 하나로 일통하는 저의 해답은 6월 23일 이렇게 적고 싶은데요 제글을 천천히 정독해주시고 답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에 대학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지금현재는 전공하고 상관없는 작은 사업을 하는 그냥 평범한 40대 일반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단독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한국전쟁(6.25)이 북에서 침입한 남침인가요? 아니면 남에서 북으로 침입한 북침입니까? 물론 얼마전까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국민분들께서 그렇듯이 북에서의 불법 침입인 남침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솔직히 많이 의심스럽습니다. 또 중국이나 아니 의외로 미국에서조차 역사학자 마다 의견이 분분하다고 들었습니다. 6.25전쟁 전에 특히 49년도에 국지전이 많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한국전쟁의 하나의 요인이지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많이들 보시는것 같습니다. 또 90년대 초에 러시아의 기밀해제문서 공개로 한국전쟁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전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선
* <제가 남침이 진실인지 의심을 갖게된 동기와 북침이라는 확신> 별 6가지로 구분
별 첫째: 1950년 6월 26일부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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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 이 자료입니다. 여기서 물론 23일밤은 1950년 6월 23일 밤입니다.
별 둘째: 또 이와 똑같이(비슷) 그 옛날 당시 1950년 6월 26일 북측의 조선중앙통신보도,(인민일보)등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아래에 옮겨 올리겠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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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통신 평양 26일] 남조선 괴뢰군이 25일 아침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이틀 전 황해도 벽성현(비포) 일대를 포격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습니다.
23일 22시부터 24일 4시까지 벽성현 다이동구(비청현 대동구) 일대에 총 105mm 곡사포와 81mm 박격포 20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23일 12시 25분부터 18시까지 벽성현 가좌구(비청현 치에쭈오구) 일대에 300여 발의 곡사포와 박격포를 발사했고, 24일 6시부터 10시까지 다시 가좌구(치에쭈오구)에 200여 발의 포를 발사했습니다.
괴뢰군이 광폭한 포격을 가한 결과 벽성현(비성현)의 농가 수십 채가 폭파되고 농민 13명이 부상당했으며 공화국의 경비대원은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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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내용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인터상에서 구 언론매체 남한,북한,중국,해외등 오래된 신문 및 기타 언론매체자료등을 보관하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다 아실거라 주소는 구자료망 > 신문 >
링크주소:URL: https://web.archive.org/web/20200214012939/http://www.laoziliao.net/rmrb/1950-06-26-1#53972
등 알아서 찾아보면 있음
혹시 두번째의 보도가 북측의 주장이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신분이 계시겠지만 이쪽을 공부하시는 학자분들은 아실거라 봅니다. 의외로 진실된 보도가 많다고 솔직히 오히려 당시에는 남쪽보다는 북쪽의 언론이 부풀리거나 찬양의 방식을 형식을 띄을수 있지만 알맹이는 솔직하다는 것 말이죠..
별 셋째: 이와 무관한 한국 현대사와 냉전사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 사학과 교수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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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관영(공식) 라디오 방송국은 다른 설(주장)이다.
(6월 26일)라디오 방송국은 한국군은 23일 오후 10시부터 은파산 일대를 곡사포와 박격포로 포격하기 시작해 24일 오전 4시가 돼서야 포격을 중단했다고 전했다. 6월 25일 새벽 이른시간 강건(Kang Toghn)휘하의 부대가 옹진반도의 두락산을 방위하고 있었는데 한국 제17연대 맹호부대(일명 호랑이 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강건의 부대는 침범한 적을 격파했다. 6월 25일 오후 2시 반이 되자 북한 부대는 옹진반도 제1홀(첫 동굴)까지 진격했고 동시에 유격대는 남측 경찰서와 군을 급습해 와해시켰다. 그만큼 ~~ 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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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참고로: 당시 1사단의 17연대는 한국군의 일반 부대의 전력과 달랐다. 연대장은 백인엽으로, 서북청년회 단원을 많이 군에 데려와 서북파를 이끄는 백씨 두 형제 중 한 명이었고, 형 백선엽은 한국군 제1사단장이었다. 이 두 부대는 모두 남한의 정예중에 정예 부대다. 군대의 대부분의 부대는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 부대의 구성원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북부 사람들이다.
이렇게 별셋째까지, 내용이 정말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한국전쟁은 사실상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남한의 북침이고 무엇보다 전쟁명칭이 6.25전쟁이 아니라 6.23전쟁이 된는 것이 옳을것이다.
이어서 계속
별 넷째: 네번째는 사실 며칠전에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기억이 나서 자료를 찾아봤다. 다름이 아니라 십여년전쯤전에 혹시 김종필 전 총리의 '한국전쟁'관련 기사' 때문에 언론,온라인등에서 어느정도 파장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문득 뇌에 섬광이 비끼듯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때의 자료를 찾아 보았다. 기사 내용은 비슷한 내용으로 2가지가 떠돌고 있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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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지
<월간조선 2011년 5월호>
기자: 안녕하십니까? 김종필 국무총리님, 건강은 괜찮습니까?
김종필: 나이가 있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기자: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로 요즘 시끄럽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장교(중위)로 근무하셨던 김종필님 생각은요?
김종필: 6.25전쟁이 아니야. 실제로는 6월 23전쟁이지. 6.25전쟁 전에, 23일부터 남한과 북한의 직접적인 전투가 자주 있었지. 이승만이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 중령이 국군을 끌고 38선을 넘어가, 북괴군을 먼저 공격한 게 전쟁의 중요한 발단이었지. (북한땅을 먼저 공격했지) 북녘땅 약 15km까지 쳐올라갔지. 개성도 빼앗을 뻔 했고. 김일성으로 하여금 全面戰(전면전)을 最終(최종) 결심하게 만든 계기였지. 먼저 침공을 당한 북한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2일후인 6.25일 새벽 1시 00분에 38선 전지역에서 불을 뿜었지
기자: 그렇다면, 왜 남침이라고 하나요?
김종필: 그거야 이승만, 박정희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기자: 우리가 알기엔 새벽 4시에 38선 全(전)전선에 걸쳐서 침공했다고 배웠는데...
김종필: 그것은 북괴군이 강원도를 포함하여 전면 공격한 게 6월 25일이라서 그렇지. 또, 전쟁 터진 것도 새벽 4시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새벽 1시 50분경이었지.
정확히는 25일 새벽 1시경이었지. 내가 육본 작전실에 마침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1시가 넘어가자 모든 전화통에 불난 것처럼 다 울렸어. 38선마다 포격받고 있는 중이라고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어. 작은 전투는 그전에도 자주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한거야. 탱크가 나타난거야..
기자: 어떻게 이런 게 큰 전쟁의 발발 원인과 開戰(개전) 시간이, 62년간이나 착오가 발생했을까요?
김종필: 착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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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지
김종필( 5.16 군사반란자, 전 중앙정보부장, 박쥐시절 전 국무총리
전 자민련 총재)의 말을 들어보자...
신동아 2010년 6월호
기자: 안녕하세요,,,건강은 어떠세요
김종필: 늙어서 예전같지 않아
기자: 6.25때 육군본부 작전실 중위로 당시 6.25 전쟁 상황실에 계셨지요
김종필; 음~ 그렇지
기자: 그때 이야기 좀 해주시죠
김종필: 전쟁은 6월 25일 새벽 4시가 아니야....실제로는 6월 23일에 터봐..
이승만이 북진 통일 명령하고, 백선엽(전 육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인
백인엽 대령이 연대 병력으로 개성부터 점령하려고,
전쟁을 시작햇지...그전에도 수백차례의 소규모 전투는 잇었지만,
6월 23일에는 전쟁다운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지...
기자: 그러면 23일과 24일에는 어땠나요?
김종필: 우리 국군이 먼저 북침하여, 서부전선 38선을 약 5km를 더 북진하엿고,
개성도 빼앗기 일보직전이었지.
당시 나는 육본 상황실에 있었고, 시시각각 전선의 무선이 날라들었지...
기자: 당시 북한 인민군측은 어땠나요?
김종필: 갑자기 국군이 대규모로 38선 넘어,북침을 하자, 저들도 놀랐나봐...
인민군들이 23일에는 북침한 국군을 방어하느라 정신없엇지
24일 낮 정오부터 인민군 정규군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햇어
기자: 25일에는요?
김종필; 24일 밤12시(25일 새벽0시)가 돼자,
인민군 중화기(탱크,대포등)들이, 38선 각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어
25일 새벽 2시가 되자 38선에서, 경기도건 강원도건
38선에서 모든 인민군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지
기자: 우리는 6월 25일 일요일 새벽4시에 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이 <남침>했다고, 수십년간 그렇게 배웠습니다.
어떻게 그런 중대한 사실을 전국민,전세계를 속일 수 있습니까?
김종필: 당시는 이승만 독재 시대였고,
그후 박정희 시대,전두환,노태우가 계속 이어졌지요
기자: 그럼 남침이 아니고, 북침이었군요?
김종필: 허허허...그만하세....다 지나간 오래된 일일세....
기자: 더욱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김종필: 허허허, 피곤해서 쉬어야겠네...잘가게
이렇게 2가지를 그대로 옮겼다.
여기서 '개성'은 '해주'를 뜻하는 거다. 당시 개성은 남측의 영토였다. 김종필이 워낙 고령이라 헷갈렸다고 한다.
이런 기사내용인데 당시 댓글등을 보면 당시 글들을 보면 신동아,월간조선등에 확인해보니 그런 기사 쓴적 없다. 아니 김종필 자체를 인터뷰,만난적도 없다고 했다고.. 또 어떤 글은 글을 올렸다가 내렸다고 기록을 삭제했다고 또 어떤 글은 김종필이 워낙고령이라 우발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실수로 했다고, 또 어떤 글은 실수로 인터뷰 내용을 기자가 흘렸다고 등등…
어쨋든 나는 개인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글이 온라인에 퍼진것은
어떤 사람이 한국전쟁에 대해 자기나름대로식의 주관적인 팩트라 여기고 그걸 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어디서 비슷한 내용을 듣거나 알게됐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그냥 올렸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또는 극좌 좌익 진보진영의 정치적 성향의 사람이 어떤 이익을 위해서 올린거라는 음모등등..
이유야 어쨌든 여기서도 1950년 6월 23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별 다섯째: 북측의 6.25,한국전쟁 관련 보도 내용이다.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투라고 명칭한다. 북측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매양 한국전쟁 관련 보도나 글들을 보면 전쟁이 6월 23일 24일 전투가 있었다 또는 포격이 시작되서 ~~ 이런식으로 지나가듯이 시작되서 글을 올리거나 보도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매양 주장되서 그런지 이제는 아예 빼놓거나 그냥 지나가듯이 보도하는데 전쟁초때부터 일관된 북측의 주장이라 무조건 무시할 내용은 아닐듯 싶어서 이렇게 다섯번째로 올린다.
예를 들어서
타이페이 타임즈 (TAIPEI TIMES)에서 기사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전쟁은 70년 전 오늘, 북한군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러시아와 미국이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분할했던 38도선을 넘어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은 현재까지도 미국과 남한의 세력으로부터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평양박물관에서 최운종 prelim 육군 대위는 이틀간의 "prelim적인 폭격" 후 "적들이 우리나라에 1~2km를 침범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조선인민군은 적의 기습을 좌절시켰고 그들은 즉시 반격으로 돌아갔습니다," 라고 최룡해가 말했습니다.
저 위의 글에서 《이틀간의 "prelim적인 폭격" 후 "적들이 우리나라에 1~2km를 침범했다"고 말했습니다.》여기서 "이틀간의" 의미는 6월 25일을 기준으로 이틀전 6월 23일을 의미하는거다.
별 여섯째: 제일 중요한 건 1950년 6월 25일 당시 그때 아무도 관찰자가 없었다는 거다. 미국의 군사고문단도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다리고'라는 미군이 있었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자고 있어서 늦게 일어나 중요한 시간대에 현장을 놓쳤다. 그도 아는 게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모두 개전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나중에 개전 전황보고도 제멋대로 가공 처리 됐다. 미국 자체도 최소 오전 10시나 돼서야 상황을 파악, 인지한 것 같다.
나는 우연히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는데 정말 6월 23일이라는 우연한 일치의 자료를 알게된다.
그러면 일단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 무력충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은 아까 위에서 설명하듯 브루스 커밍스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바로 최태환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일 최태환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개성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는 자기의 전쟁 경험을 1989년 서울에서 출판된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남겼다. 그 내용이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1950년 6월 23일 밤 한국군 제17독립 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
ㄱ.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인민군) 15연대가 주둔하는 옹진반도로부터 백인엽이 이끄는 국방군 17연대 맹호부대 병력이 은파산을 폭격(포격을 폭격으로 오기했음-옮긴이) 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속보가 날아왔다.”
최태환은 은파산 전황 속보를 1950년 6월 24일에 수신한 것으로 기억했다.
ㄴ. 평양 라디오 방송의 6월 26일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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