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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에게 곤장 맞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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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중국 왕조에서 황제는 하늘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존재였다.

모든 영토의 주인이자 인간 세상의 지배자였다.

외국의 군주들조차 황제에게서 영토와 작위를 하사받아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들 역시 ‘천자(天子)’의 신하로서 각기 맡은 지역을 다스릴 뿐이었다.

그런 만큼, 황제의 몸은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절대불가침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중국사 2천년 역사상 유일하게 신하들에 의하여 용상에서 끌려 내려와 곤장을 얻어맞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까지 해야했다.

그 황제는 무능한 암군 이었을까? 아니면 황제로서의 권위조차 지키지 못한 인물일까?

이제 그 황제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그 주인공은 바로...



금 태종 완안오걸매

12세기 초,  오랜 세월 동안 동안 거란족에게 눌려 지내던 여진족은 

완안부의 수장 완안 아골타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마침내 금나라를 건국하고, 오랜 강적이던 요나라를 무너뜨린 뒤 북방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완안오걸매는 금 태조 아골타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천하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형제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과거, 요나라의 황제 천조제가 여진족 부락장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완안 아골타는 부락의 대표로 참석했다.

연회의 관례에 따라, 참석한 이들은 요나라 황제를 즐겁게 하기 위해 춤을 춰야 했다.

그러나 아골타는 이 굴욕적인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고, 때려 죽어도 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동생 오걸메가 형 대신 황제를 즐겁게 해주겠다며 나섰고

그 자리에서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는 모습을 보여주며 황제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요 황제는 대만족했고, 아골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오걸매는 아골타의 최즉근으로서 충심을 다해 형을 보좌했다.

아골타가 친히 군을 이끌고 요나라 정벌에 나선 동안,

오걸매는 수도에 남아 조정을 안정시키고 내정을 총괄했다.

이후 1123년, 아골타가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병사하자

오걸매는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금나라 제2대 황제, 금 태종으로 즉위했다.



1120년, 금나라는 송나라와 해상의 맹이라 불리는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합의했다.

요나라는 금나라의 막강한 군대 앞에 무너져버렸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직 요나라는 멸망하지 않았다.

황실은 연경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고, 잔당들은 사방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동맹국 송나라는 삽질을 거듭하고 있었다..

송나라 군대는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버티고 있던 연경을 총공격했지만,

잔당에 불과한 요나라 군대에게 처참하게 박살나버리고

결국 송나라는 스스로 연경을 점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125년, 금나라 군대가 연경을 함락시키고 천조제를 사로잡으면서 요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요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끝내지 못하고, 금나라에 손을 빌리게 된 송나라는

어쩔 수 없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많은 이권들을 금나라에게 넘겨야 했고, 

금나라가 요구하는 막대한 세폐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약속한 세폐조차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금나라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송의 태도는 금 태종의 분노를 샀다.

금 태종은 대대적으로 송나라를 침공했고, 송나라의 수도 개봉까지 밀고 내려갔다.

다급해진 송나라는 급하게 금 5백만 냥과 은 5천만 냥,  우마 1만 필 등을 금나라에 제공하고

수많은 영토를 금나라에 넘기며, 송나라 황제는 금나라 황제를 숙부라고 부른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해

겨우 금나라의 진군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송나라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앞서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다시 약속한 세폐를 지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금나라에 귀순했던 거란족 장수들까지 부추기며 반란을 시도했다.

나아가 고려에게까지 손을 내밀며 금나라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격노한 금 태종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곧바로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다시 침공했고, 개봉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절박해진 송나라는 황하 이북의 모든 영토를 할양하겠다며 화평을 요청했지만,

금 태종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금나라 군대는 전 황제 휘종과 현 황제 흠종을 생포하여 북쪽으로 끌고 가버렸다.

수 많은 왕족과 신하들도 함께 사로잡혀 포로로 전락했다.

이렇게 송나라는 멸망했고, 

이 사건이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 '정강의 변'이다.



금 태종은 요나라와 송나라, 두 양대 제국을 멸망시킨 명군이었다.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북방을 평정하고, 중국 대륙의 절반을 장악하는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런데...

왜.. 이런 인물이 곤장을 맞았을까?



그 이유는...  어떻게 보면 그의 형, 완안 아골타에게 있었다.

금나라를 처음 세웠을 당시, 국고는 바닥이었고 

황궁조차 거적 하나 깔린 초라한 모습에 불과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태조 아골타는 사치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는 신하들과 하나의 엄죽한 맹약을 맺는다.

" 국고에 있는 재물은 오직 전쟁에만 사용한다. 이를 어길 경우, 그가 누구라도 무조건 곤장 20대를 맞는다."

이 맹약은 아골태가 죽을 때까지 잘 지켜져 내려왔다.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금 태종 역시 형의 유지를 받들어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황궁의 성벽은 버드나무와 유수로 대충 만들어 졌으며

금 태종은 그런 초라한 건물에서 일을 보고 뒤뜰의 작은 공간에서 거처했다.

돼지를 기르고 양을 치는 백성들은 황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자유롭게 황궁을 드나들었다.

중요한 군사회의를 할 때만 사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던 금 태종이었지만..

딱 하나, 참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술이었다...

검소한 삶을 살면서도, 애주가였던 금 태종은 좋아하는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금 태종은 

달도 없는 캄캄한 방에 몰래 창고의 문을 열고 일부 재물을 꺼내 술을 먹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을 오래가지 못했다.

승상이 국고를 점검하다가 그 흔적을 발견했고, 즉시 중신인 '점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점한은 망설임 없이 이 사실을 조회 때 공개했다.

개망신을 당한 금 태종이 당황하고 있을 때,

신하들은 전부 모여, 상의를 한 끝에 이 낭비하고 사치하는 "혼군황제"를 처벌하기로 결정한다!



신하들은 금 태종을 용상에서 내려오게 한 후에 곧장 곤장 스무대를 쳤다.

그리고 그를 다시 용상에 모셔 놓은 다음, 모든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금 태종에게 죄를 청했다.

금 태종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꾹 참고 내시가 건넨 술을 들이키고, 신하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검소한 삶을 살면서 야채와 두부만 먹고 살았다.

죽을 때까지



이는 아직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아 부족 국가의 색채를 강하게 간직한

초창기 금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황제마저 거침없이 곤장을 쳐버리는 상남자 여진족

이런 노빠꾸스러움이 중국을 정복하는 원동력이 되었지 않았을까?




- 금 태종: 신하들에게 곤장을 얻어맞은 유일한 황제 , 오정 (悟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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