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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독립운동가고, 왜 누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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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독립운동가라고 부른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약 300만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을 것이라 추산했고,

2019년 기준으로 독립운동 행적이 인정되었던 인물은

약 15,454명에 달한다.


"엥? 그럼 그 300만명 다 독립운동가라고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그렇다.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다 독립운동가, 유공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왜 그렇지 못 한 지 알아보자.








1. 모든 독립운동가가 똑같은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나눠보면 이러한 유형이 있다.

우선,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론의 문제이다.

1. 외교론자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자는 세력이 있었다.

이승만과 구미위원부가 이 쪽에 속한다.


2. 무장투쟁파



의열단을 비롯한 단체들은,

자신들의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끊임없는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독립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실력양성파



그리고 안창호 선생과 같은 사람들은,

해외에서 한인들의 실력을 키워서 독립 운동의 기반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분류가 있다.

1.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김구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그 예시이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에 몸담아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공산주의와는 명백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이 있다.



2.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한편,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사회주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닌의 민족자결사상이 당시 식민지배로 신음하던 국가들의 지식인들에게는

몇 안되는 도움의 손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3.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소위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라고 불리우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도 여기에 있었다.

박열이나 백정기 선생이 이 쪽에 해당한다.




여담이지만, 이들의 행적에 대한 영화가 있다.

장동건,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 정준호같은

지금 한 자리에 모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

"아나키스트"가 있는데,

영화에서 계속 던져지는 아나키스트들의 행적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는

몇 안되는 수작이다. (액션신이 묘하게 홍콩영화를 베낀 감은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상 문제는

현대의 좌파-우파, 진보-보수와 맞물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우파가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모든 좌파가 진보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것이 아니듯이,

그리고 또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이 칸에만 놓기에는 상당히 미묘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일은 무슨 분류표를 가지고 와서 딱딱 나눠놓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2. 이 사람은 좀.....



각설하고, 이제 한국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변절한 독립운동가



우선 모든 독립운동가가, 1945년 8월 15일까지 꾸준하게 독립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인 즉, 누군가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춘원 이광수.

2.8 독립선언에 관여했던 그는 결국 변절하고 만다.

당시 그와 함께 천재로 소문났던 최남선도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했으나,

이후 일선동조론과 같은 친일활동으로 태세를 바꾸었다.








2.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던 사람들



해방이 된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쪽으로 넘어갔는데,

박헌영은 외무상(외교부 장관)이 되었고, 또한 남로당을 이끌며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허정숙도 마찬가지로 북한 내각에 참여해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넘어간 서울에서

선전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김원봉의 경우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특히나 문(      )이 대통령이었던 당시,

김원봉을 언급하자, 논쟁이 불붙었던 시기를 생각해보자.

북한 정권에 참여했던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언급하기에는

사회적 논의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반발이 심했다.











'시발 어쩌자는거야'

세상 모든 일에는 잣대를 공명정대하게 들이밀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행적만 떼어놓고 보면, 훌륭한 독립운동가일지 모르나

이후 북한으로 넘어가서 대한민국을 침공했던 일이라든가,

혹은 변절했던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더 할 말은 없으니,

독립운동가 백정기 선생의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끝내보고자 한다.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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