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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제작)(글자많음) 임진왜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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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조선의 문화, 군사, 정치에 대한 재밌는 내용들이 올라와서 써보는 글

 

이번에는 조선 역사의 비교적 초기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한 사실들을 다룸

 

너무 자세하게 다루면 길어지니까, 대표적인 것들만 간략히 정리해왔으니 재밌게 봤으면 함

 

 

 

시작

 

1. 조선 정부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 몰랐다.

 

 

 

조선은 일본의 상태를 항상 파악하고 있었고

통일이 되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측으로

군비 증강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다만, 통일 되자마자 쳐들어오는 건 ㅁㅊ짓이라 예상했고

일본은 통일 하자마자 쳐들어가는 ㅁㅊ놈이 수장이었다.

 

 

2.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역습할 의지도 없었다.

 

조선은 보복성 역습에 대한 건의가 활발히 나왔고 명나라와 논의가 진행되었다.

 

 

 

실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일본 본토에 남아 있는 병력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밑으로 흡수된 영주로

조선 침공을 반대했기 떄문에 각종 사유를 들어 출진하지 않았고

상당수의 영주들과 함께 본토에서 병력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은 꽉 막히고 활을 숭상하여 조총을 도입하지 않았다.

 

 

 

 

조선은 화력덕후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원거리 무기에 진심이었다.

당연히 조총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었고, 정밀하게 평가하였다.

조총이 도입되지 않은 것은 잘모르는 책 벌레들이 반대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시대를 생각하면 상당히 선진적인 전문가 시스템의 단점이 원인이었다.

조선은 특정 분야에 적합한 전문가를 임명하고 그 의견을 존중하였다.

장점은 전문가의 판단이 조직에 잘 반영된다는 점       

단점은 전문가의 판단이 조직에 너무 잘 반영된다는 점

당시 조선군 최고의 무장인 신립이 조총에 회의적이었고 이게 뼈아프게 작용했다.

 

 

4. 육군은 사실상 궤멸당하고 의병이 일을 다했다.

 

 

 

조선시대의 의병은 예비군이었다.

고려시대 정규군 유지에 많은 세금이 들어가서 문제가 생겼고

이를 줄이기 위해 조선시대는 정규군을 줄이고 의병을 활용하였다.

전쟁이 나면 각지에서 군사를 조직하고 조정에 합류하는 시스템을 구성

 

 

 

임진왜란에는 두 종류의 의병이 있다고 보면된다.

군사학을 배운 선비가 의병을 조직하고 관할에 신고(좌측 곽재우)

의병을 조직할 수 있는 장수를 관할에서 파견하여 조직(우측 김덕령)

 

 

5. 해전 말고는 제대로된 승리가 없었다.

 

 

 

 

모든 군함은 보급기지가 필요하고 이순신은 남은 조선땅에서 보급하였다.

조선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 최대 200명까지 탑승하는 대형 군함이었다.

당연히 수 십척씩 운용하는 조선해군은 그만큼 큰 보급이 필요하였고

이는 조선 육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진격은 전라도를 무시하고 간것이 아니라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군의 전략은 수륙병진,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치고가는 것

다시말해 조선 수군이 버티는 만큼 육군도 싸우고 승리하고 있었다.

 

 

6. 조선인은 근접전에 약해 일본군에 밀렸다.

 

 

 

오랜 평화로 인해 없어진 전투기술과 전투경험이 문제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경험이 쌓인 조선은 육지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용인 전투에서 대패한 조선군은 전라도에서 재결집 하였고

목책만으로도 일본 주력군과 싸워 길목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7. 충무공 이순신은 진급하여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반만 맞는 이야기다.

조선 해군은 총사령관 개념이 없어 임진왜란 초기에 애를 먹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을 만들고

충무공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에 임명된다.

 

 

 

 

한반도 남쪽 세 개의 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는 5개 수군의 지휘권을 가지며

수군의 대장(수군절도사) 중 한 명이 겸직하여 맡는다.

 

 

8. 거북선은 이순신이 개발하였고 임진왜란에만 사용되었다.

 

 

 

 

 

이순신 이전에 거북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나왔다.

이순신이 대단한 점은 만들어 진적 없는 무기체계를

과감히 도입하고, 용도에 맡게 최적으로 활용한 점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에만 활용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많지 않았을 뿐이지 조선 말기인 고종시대 기록에도 등장한다.

 

 

9. 조선군은 천 갑옷을 입고 싸웠다.

 

 

 

 

드라마의 폐해

천으로 된 갑옷만 입었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병들도 어느정도 갑옷을 입었다.

 

실제 조선군은 보직별로 갑옷이 분류되어 있었다.

다만, 철 생산량이 적어 일반병은 흉갑과 투구 정도로

적게 입고 싸우긴 했다.

 

 

10. 일본은 화포를 개발하지 않았다.

 

 

 

 

조총을 개발한 일본에 대포가 없을리가 없다.

임진왜란 중에도 일본군의 화포에 입은 피해도 여럿있다.

다만, 백병전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군의 인식떄문에

대포는 후방 지원을 조금 할 뿐 적극적으로 쓰진 않았다.

 

 

11. 일본군의 쾌속 진격은 계획된 것이었다.

 

 

 

 

 

반 정도 계획된 일이었다.

일본군은 20일 만에 부산부터 한양까지 진격하였는데,

히데요시의 전략은 약 2만 정도로 구성된 9개 군단 중

제1군(고니시)과 제2군(가토)을 교대로 진격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1군의 고니시가 계획을 무시하고 진격을 계속했고

다른 군들이 쫓아 진격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공격했다.

 

 

12. 일본은 조선의 왕이 도망가자 당황했다.

 

 

 

 

일본은 영주가 할복하더라도 도망가지 않는데,

조선왕은 바로 도망가니 당황했었다라는 오해가 있다.

 

 

실제로는 성과 병력이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영주는

끝까지 후퇴하면서 싸웠고

후퇴할 곳이 없을 경우에 포위당한 성에서 끝을 마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육군이 밀린 조선 선조가 도망가는 것은 당시로서도 이상한게 아니었다.

 

 

서로 관련이 있는 내용만 끌고 오려고 했는데

쓰고나니 중구난방이네 재밌게 봤으면 좋겠음

다음에 또 적당한 주제 생기면 글싸지르고 갈게 ㅂ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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